'내 안의 두 인격체간의 다툼은 죄와 선한 양심간의 투쟁'
사도바울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한 로마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투쟁’은 나와 다른 사람간의 다툼이 아닌 내 안에 존재하는 두 인격체 간의 갈등과 다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다른 인격체가 존재하게 할수 있는 것일까?
내 안의 두 인격체간의 다툼을 파악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속사람인 내가 겉사람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할수 있을때나 가능하다. 속사람은 누구이기에 겉사람의 판단이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속사람이 냉정하면서 율법적인 판단력과 객관성을 가지면서 하나님이 첫 사람에게 준 선한 양심을 가진 상태라면 겉사람의 판단이 가능하다. 겉사람과 속사람의 다툼은 다름에서 시작이 되는데 비슷한 판단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두인격체간에 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두 인격체간의 다툼은 속사람이 원하는 상태를 겉사람이 따르지 못하고, 겉사람이 원하는 상태를 속사람이 거부하는 갈등에서 기인한다.
언제 이같은 갈등이 발생하는지는 내 안에 있는 양심의 법이 살아날 때이다. 그러면 언제 양심의 법이 작동하게 되면서 살아나는가, 그리고 살아 났는가?
그것은 자연인인 한 사람이 성경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받음으로 성령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임재하면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면서 성령의 양심의 법이 작동하면서 생기는 내부적인 갈등 현상이라 할수 있다.
' 사람의 영혼은 아담의 범죄이후 죽어서 태어난다.'
하나님은 아담을 살아있는 영으로 창조했지만 아담의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영혼이 죽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경고했음에도 아담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었다. 하와가 준 선악과를 먹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 육신이 죽은 것이 아니다. 아담은 육신적으로 930세까지 살았다.
선악과를 먹은 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의 영혼이 죽은 것이다. 성경에서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죽어있던 그 영혼이 하나님과 다시 연결될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영혼구원이다. 영혼구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과거죄(원죄)와 현재, 미래 등 모든 죄에 대한 속죄를 이룬 그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개인이 영혼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어주신 영혼이 살아나면서 속사람과 겉사람의 분리가 시작된다. 뇌 과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사람 몸 안에는 여러 개의 인격체가 존재하는 다중 인격체를 가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포괄적으로 두가지 인격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반해 심리학자들은 성격상이나 기능상 등으로 이를 세분화시켜 다중 인격체로 설명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사도조차도 죄와의 다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매일 묵상 통해 이겨낼수 있다.'
그러면 속사람과 겉사람의 다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우선적으로 본인의 구원에 문제가 있는지 의심을 해 봐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출발선상에 있거나 아니면 죄에게 굴복 당해 숨을 못쉬고 있을 정도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볼수 있다. 속사람과 겉사람의 다툼은 사도이기에 겪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현상이다. 그러기에 이 다툼에서 이기기 위한 준비를 해야 된다.
어떤 교파에서는 로마서의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말씀을 임의대로 해석해 죄는 내가 아닌 내 안에 있는 죄가 짓기에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논리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성경을 오해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율법을 지키려는 율법주의자들과 율법과 은혜 혼합주의자들, 그리고 불교와 같은 종교를 통해 율법을 지키려는 종교인들은 율법을 지키려 할수록 육체적 한계에 도달함에도 그이외의 방법을 모르기에 끝까지 율법을 지키려는 그 생각이 너무 안타깝다. 율법을 지키려는 종교인들에게도 이같은 속사람과 겉사람의 다툼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영혼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종교인들에게는 속사람과 겉사람의 이분적인 현상이 뚜렷하게 일어나지 않고 단지 율법의 엄격함에 따른 육체의 한계만을 느낄 뿐이다. 그렇지만 영적 작용인 약한 양심의 법이 작동하면서 내면에서는 선하게 살려는 마음이 있어 율법을 통한 육체적 한계에 고통스러워할수 있다.
종교인들이 율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육체내 죄의 본성을 더욱 자극하여 ‘하라, 하지 말라’ 반작용으로 율법을 범할 수밖에 없는 육신의 연약함을 체험하게 된다. 율법은 온갖 일을 항상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에 죄성을 안고 태어나 사람은 율법의 거룩함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육체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율법으로는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를 느끼며 하나님의 거룩함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율법은 인간이 오를수 없는 나무이다.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에는 흠이 없다고 스스로를 자평한 사도 바울조차도 죄의 법아래로 사로잡혀 오는 것에 자신의 곤고함을 한탄하며 죄의 법과 싸워 이길 힘이 스스로에게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죄가운데 살았느냐? 그것은 아니다. 사도바울은 미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이겨냄을 감사했다.
그래서 로마서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도바울은 이세상 풍속을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한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 죽었음을 인정하고 시인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안에 있음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됐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겨낼수 있는 자리는 십자가에서 그정과 욕심을 못박혔음과 새사람이 되었음을 수시로 묵상하면서 감사의 삶을 살 때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