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주관적인가? 아니면 외부적 조건에 따르는가?’
행복은 3,000년 철학사 난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행복을 연구하고 사유하여 정의를 내렸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행복의 근원을 제시하지 못했다.
행복에는 기쁨, 만족, 즐거움, 웃음, 평안함, 안전, 웃음, 보람, 쾌락 등 수없이 많은 요소가 존재한다. 이중 무엇이 행복을 주는지 아니면 모든 조건을 충족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는지 다양한 의견만이 제시되었다.
대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면모를 갖춰야 한다고 의견이 집약된다. 기쁨과 만족 등이 주관적인 마음의 판단이라면 재산과 명예 등은 사회의 기준은 외부 조건이다. 행복은 주관과 객관적인 조건의 조화로움에서 온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는 ‘행복론’에서 명예와 재산, 외모, 언변에 조금 부족함을 느끼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제시했다. 행복의 조건을 대체로 외부에 두었다.
칸트는 윤리는 보편적 어떤 것이지만 무엇이 행복인지는 각자가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행복을 주관적 관점에 두어 개인의 개성만큼이나 행복의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쇼펜하우어, 행복은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순간 한정’
염세주의 철학자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순간으로 한정했다. 충족에서 과잉으로 넘어가면 권태와 지루함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무엇에 충족인지는 각자가 다르기에 내 외부의 조건을 포함한 충족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신경세포의 존재전제했다. 이에 따라 하등 동물에 비해 신경조직을 갖추고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인간은 많은 고통에 노출되어 가장 불행할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서양 철학은 행복이라는 주제를 고대로부터 발전시켜 왔지만 동양은 다르다. 동양 철학 핵심인 유교는 행복이란 개념보다는 자신을 갈고 닦는 수신에 초점을 맞췄다.
불교철학도 자비와 평정심에 초점을 두고 행복보다는 불행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이처럼 동양철학은 행복 추구를 욕망으로 봤기 때문에 행복한 삶보다는 지족하는 마음을 선으로 여겼다.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도 행복의 개념이 인식되면서 개인이 우선적으로 생활화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한국 직장인을 대상으로한 설문조사에서 삶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대부분이 ‘행복 추구’를 꼽았다. 그런데 무엇이 행복인지는 정확하게 답변하는 직장인은 많지 않았다.
‘행복은 잠시만 허용되었나?, 행복의 근원은 없나'
행복의 사유 폭이 넓은 이유는 행복을 마음의 내부 원인과 부와 재산 등 외부 원인을 망라한 조화로움에서 행복이 온다는 판단 때문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행복한 삶이 어렵다고 판단하기에 그렇다.
그러면 행복은 무엇이며, 어떤 상태에서 오는가?
행복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행복 나무가 뿌리를 내린다면 행복의 시작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상당수 철학자들이 행복은 잠시 잠깐에 불과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인생을 70년으로 계산하여 행복한 시간은 불과 30시간도 되지 않는다는 오래전 통계를 본적이 있다. 행복이 잠시인 이유는 행복의 기초를 다지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온 행복이기에 안개처럼 지나간다.
그러면 행복의 기초는 무엇인가? 기초를 찾아보자.
인간의 참 행복에 대해 철학자들이 3,000년을 사유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다. 앞으로 수백년을 더 사유한다 할지라도 답을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진정한 행복은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만이 알기 떄문이다. 그 답을 창조주에게 물어야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창조주에게 물어야 정답이 나온다’
창조주는 이미 그 답을 성경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시편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로마서에 죄 사함을 받는 다윗의 행복을 기록했다.
“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죄의 가리우심을 받는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
성경은 왜 죄를 가리움을 받는 자, 용서받는 자를 행복하다 했을까? 그 이유는 첫사람 아담의 창조과정을 살펴보면 알수 있다. 아담은 창조주를 닯은 산 영(spirit)으로 창조되어 에덴동산에서 창조주와 동행하며 살았다.
창조주가 금지한 선악과를 아담이 임의로 따먹어 창조주께 범죄함으로 창조주를 닮은 그 영이 죽었다. 창조주와 교통이 끊어졌다는 의미다.
아담은 선한 사람, 정직한 사람으로 창조되어 창조주와 동행함으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 순간이 아닌 지속적인 행복한 삶이었다. 진정한 행복은 상대적이지 않다.
아담은 범죄함으로 정직함을 잃은 이후 아담과 그 후손들은 죄성을 갖고 태어나면서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렸다.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장편서사시 ‘실락원’에서 죄를 짖고 에덴동산에서 쫒겨 나면서 사람은 진정한 행복, 진정한 즐거움을 잃어 버렸다고 아쉬워 했다.
‘죄를 가리움 받은 상태가 행복의 근원’
행복의 근원은 죄의 가리움을 받고 창조주를 닯은 그 영이 살리심을 받은 상태가 행복의 기초이며 토대이며 뿌리이다.
사람은 죄를 가리움을 받는 행복 근원 위에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 행복의 근원을 찾게 되면 행복의 샘에 뿌리를 내린 행복나무가 된다. 진정한 평안은 마치 새가 폭포수 아래 집에서 폭포수를 맞으면서 알을 고요하게 품는 그 상태이다. 행복도 이와 비슷하다.
인간은 창조주와 영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피조물로 창조됐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가기전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다. 피조물은 창조주와 함께 동행할 때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