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여호와 믿음, 창세이후 6000년전 시작’
창조주 여호와를 중심으로한 믿음의 신앙은 창세이후 6,000년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BC2000년께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한 여호와는 이스라엘 중심의 세계 역사와 예언을 통해 창조주임을 이들에게 확신시켰다. 1600년동안 구약과 신약 66권의 성경을 유대인을 통해 기록케 했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경의 역사와 함께 한다.
불교는 BC500년께 인간의 생로병사를 깨닫기 위해 출가한 싯타르타에 의해 불교가 시작됐고 AD1세기 헬라문명의 영향을 받아 대승불교로 변화과정에서 다양한 부처상과 보살상이 생겨났다. 불교의 사상은 부처의 초기 사상을 근거로 이를 계승한 승려들에 의해 집대성하며 성장되었다.
기독교의 신본주의과는 달리 불교는 인본주의다. 불교는 진화론적 사고에 중심을 두고 발전시킨 철학인 반면 기독교는 창조를 중심에 둔 신앙이라는 면에서 차이가 난다. 개인 중심이냐 아니면 신을 통한 개인 중심이냐의 차이다.
불교의 자아(自我)와 기독교의 자아(self)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불교에서 자아를 알지 못하면 무아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가독교에서 자아를 모르면 매우 중요한 영적 사건을 이해하기 어렵다.
뇌과학을 통해 살펴보자. 사람내에 최소 둘이상의 자아가 존재해야 의식이 존재하고 추론이 가능하며 스스로를 분석하고 자책하며 변화가 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불교나 기독교의 자아는 비슷하다.
만약 사람 내에 자아가 둘 이상 존재치 않으면 불교의 무아 개념은 사라진다. 무아는 A라는 고정불변의 자아가 변화가 가능한 B자아를 명상 등 수양을 통해 변화시켜 무아의 상태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변화되는 자아가 있고 이를 지켜보는 자아가 있기에 가능하다.
‘불교, 자아를 극복해야 무아상태- 기독교 옛자아와 새로운 자아 깨달아야’
창조론과 진화론측면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살펴보면 양자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극과 극을 비교해 봐야 나열식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약1,100만명, 불교 인구가 870만명(2015년기준)에 달해 기독교와 불교의 자아를 나열식의 단순 비교만 해도 보탬이 되리라 판단이 된다.
불교에서 자아는 번뇌의 주체이기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오랜 명상과 수양을 통해 자아를 극복하면 무아의 상태가 된다. 무아 상태라고 외부에 달라진 모습은 없다. 내부의 변화에 그친다. 무아(無我)는 내가 존재치 않는다는 개념이다.
기독교의 자아(self)는 불교와 달리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불교에서 명상 등 수양을 통해 자아를 극복하려는 이유는 집착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함이다. 전적으로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불경이나 먼저된 사람의 길을 참고는 하지만 결국 홀로 그 길을 가게 된다. 쉽지 않는 가시밭길이며 고난의 길이다.
기독교는 성경에 !00% 의지한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자아를 찾아볼수 없다. 옛사람과 새사람, 겉사람과 속사람 등으로 기록됐다. 영어성경 NIV에서 살펴보면 옛사람을 옛자아 OLD SELF로, 새사람을 새로운 자아 NEW SELF로 기록했음을 알게된다.
‘옛자아, 개인 노력이 아닌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못박혀 죽었다’
옛 자아는 죄를 지을수 있는 죄성(罪性)을 갖고 있는 자아를 말한다. 옛 자아는 개인의 어떠한 노력과 고난을 통해서도 죄성의 옛자아를 벗어날수 없다. 그러나 벗어날 유일한 길이 존재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룬 죄 용서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바로 영생의 길이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예수와 함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성경은 선포한다. 그리고 옛자아가 죽었기에 성령이 그사람 안에 들어온다.
동시에 죄성으로 훼손된 심령이 새롭게 되면서 하나님과 같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은 새로운 자아를 입게 된다. 영생을 위해 사람이 한 일은 십자가의 죄용서를 받아들이려는 마음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이기에 은혜이다.
성경은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함을 얻기에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함을 얻을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그리스도가 걸어간 길, 생명의 길을 따라가면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못박혔기에 때문이다.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했다.
‘불교 무아상태 뇌과학적으로 이해 가능’
불교철학에서 ‘나’라는 존재는 인연가합(假合)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냈기에 인연이 다하면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존재이다.
불교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극미(極微)라고 부른다. 극미는 극소의 7의 7승분의 1에 823,543분의 1를 곱한 상태로 사실상 수학적으로 제로(0)이다. 우주 만물도 극미의 모임이며 인간도 지,수,화,풍 4대의 극미의 모임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재 보이는 실체도 결국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기에 없는 상태와 같다는 의미다.
개인이 수련을 통해 무아를 깨닫고 번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뇌 과학적으로 사람의 뇌 구조상 육체와 마음의 고난도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면 일정부분 가능하다.
‘하버드대 테일러 죄놔 출혈, 물아일체와 우주에너지 체험-불교 무아상태’
실제 하버드대 신경해부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샤워중 자신의 손과 벽이 하나가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체험을 했다. 또 시끄러웠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나와 세상을 구분했던 인식적, 물리적 경계가 사라지면서 엄청난 우주의 에너지 자체만을 느끼는 체험을 했다. 그러면서 시공간도 나도 없어져 버리는 초월적 일체감을 느꼈다고 한다.
걱정이 사라지고 평안과 안락과 축복, 행복, 충만으로 감정이 휘감아 왔고, 거대한 에너지 장속에 헤엄치고 있음을 느꼈다. 테일러가 경험한 상태를 불교식으로 해석하면 무아와 물아일체의 상태로 열반의 상태로 볼수도 있다.
테일러에게 이 현상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좌뇌 출혈이 원인이었다. 좌뇌에는 우리 몸과 외부를 느끼는 신체 경계 감각이 존재하는데 출혈로 경계 감각이 사라졌고 죄뇌 기능이 떨어지면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됐다. 테일러에게 일어난 체험은 불교에서 수양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사람의 죄 뇌는 논리력과 분석력, 언어, 숫자 등을 담당하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스토리텔링의 주요 부위이다.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잡념이나 과거의 기억은 죄뇌가 스토리텔링의 형태로 기억해 놓은 기억중 일부이다.
집착을 없애고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죄뇌의 스토리텔링을 알아차리는 방법을 통해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 방법이다. 불교의 무아를 뇌과학으로 분석해 좀더 체계적으로 연구하면 불교의 명상법이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