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16일 오전8시50분께 침몰을 시작해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와 1912년 4월15일 새벽2시30분 1,514명이 사망한 타이타닉의 참사는 모두 인재였다.
길이 269m, 20층 높이의 46,000톤급 절대 가라앉지 않는 ‘불침선’ 타이타닉호는 2,223명의 탑승객을 태우고 북대서양을 지나던중 떠내려온 빙산과 14일 밤11시40분 충돌해 3시간만인 15일 새벽 2시30분 침몰했다.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가져온 빙산과의 충돌은 불침선이라는 자만심에 경고를 무시한 통신담당자의 책임감 결여에 원인이 있다.
통신 담당자인 잭 필립스는 북대서양을 지나면서 다른 선박들이 수 차례 보낸 빙산 충돌 경고를 무시했다. 20km 앞서 가던 캘리포니아호의 통신원이 우회하라는 권유조차 잭 필립스는 무시했다. 그 결과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하였고 1,514명이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세월호는 인천-제주간 여객선으로 2014년 4월16일 오전8시49께 476명을 태우고 제주를 향해가던중 한국에서 2번째로 조류가 빠른 진도군 조도 맹골수로에서 급격한 방향전환으로 선체 좌현부가 침몰을 시작했다. 선체가 침몰하고 있어 구조계획을 세워 매뉴얼대로 움직여야 하는데도 선장과 선원들은 아무런 구조작업을 하지 않고 자신들만 여객선을 탈출했다. 선장과 책임있는 선원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304명의 사망을 불렀다.
'타이타닉과 세월호 선장, 책임감 천양지차'
100년을 차이를 둔 타이타닉호와 세월호의 대참사는 모두 인재였다. 하지만 탑승객들에 대한 타이타닉호와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의 책임감은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선장은 위기상황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를 먼저 구조하라고 명령하고 끝까지 구조작업을 진두 지휘하면서 타이타닉호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타이타닉호의 구조 책임자 이등항해사 찰스 래히틀러(당시38세)를 제외한 주요 승무원50명은 구명정의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선장과 함께 탑승객의 생명을 구조하는데 끝까지 책임을 다하면서 여객선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1번 전산사는 새벽2시 침몰 마지막 순간까지 ‘SOS’를 입력하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타이타닉호의 악단 단장이었던 웰리스 하틀리(당시34세)는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파도에 휩쓸리기까지 단원들과 함께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이라는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승객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에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의 무책임은 상식을 넘어섰다. 여객선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경기 안산 단원고생 325명이 함께 타고 있었다. 선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원들은 ‘선내에 가만있으라’는 방송만 반복하면서 선체가 급격히 침몰하자 선내에 탑승객들은 그대로 두고 자신들만 탈출했다. 황당한 일이 아닐수 없다.
어린 학생들은 ‘가만있으라’는 방송을 그대로 믿고 침몰 직전까지 선내에 남아 그 피해가 커졌다. 이 방송을 한 후 선원들중 누구하나 탑승객들에게 선체의 위험을 경고하지 않은 채 모두 배를 탈출했다.
그나마 선내 방송을 믿지 못하고 탈출한 탑승객들은 대부분 자력 구제한 사람들이었다. 방송을 그대로 믿은 탑승객들은 선내에서 이유도 모른채 죽음을 맞이했다. 물론 세월호 승무원인 박지영씨와 알바를 하던 김기웅씨, 사무직 승무원이었던 정현선씨, 양대홍사무장 등 학생들의 탈출을 끝까지 돕다가 사망한 승무원도 있었다. 남윤철선생님과 최헤정선생님은 제자들을 먼저 내보내고 자신들은 죽음을 맞았다.
세월호 내부 관리 규정에는 비상 상황시 선장은 선원을 총지휘하고 선원은 탑승객의 탈출을 도와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조류가 빨라 위험한 맹골수도에서조차 입사4개월 3등항해사가 운항을 지휘하고 있었다.
'스미스 선장 배와 함께 끝까지, 세월호 선장 승객외면 탈출'
그런 상태에서 선장은 속옷차림으로 탈출했다. 이런 무사안일하고 무능한 선장에게 여객선을 맡긴 회사도 문제지만 선장에 비할 바 아니다. 선장이 무능하고 책임감이 없을 때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북대서양에서 사고를 당한 타이타닉호와는 달리 세월호가 침몰한 지역은 조도 동서거차와 관매도 등 유인도와 무인도 섬들이 몰려 있고 오전이었고 주변에 어장선과 어선들도 있었다. 침몰 뉴스를 듣고 사고현장과 1시간 거리의 서망항에 있던 꽃게어선들이 구조를 위해 달려갔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책임감있게 행동했다면 충분히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만약 타이타닉호의 에드워드 스미스선장과 승무원들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 처럼 위기상황에서 먼저 탈출했다면 타이타닉호에서 709명의 탑승객이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타이타닉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먼저 탈출했다면 승객들이 구명정에 서로 올라 타기 위해서 아비규환의 혼란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약한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은 구명정을 제대로 타지 못했을 것이다. 스미스선장의 책임감이 없었다면 생존자는 709명은 커녕 이 숫자의 절반도 되지 않았을을 지도 모른다.
타이타닉호는 죽음앞에서 책임감을 다한 선장과 선원이 있었기에 세계적인 부호들과 권력층들이 구명정의 자리를 양보하면서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이 우선 구조되도록 자기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을까?
2014년10월 세월호 검경합동수사본부의 수사결과에 따르면 세월호의 침몰원인으로 화물 과적과 고박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 조타수의 운전미숙등으로 꼽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조타기의 결합가능성을 배제할수 없어 조타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선체 침몰 직전 탈출한 이모 선장에게 무기징역, 선원14명에게 징역1년6개월부터 12년을 선고했다.
'버큰헤드 규정, 해난사고시 어린아이와 부녀자 먼저 세월호는?'
세월호에서는 어린아이와 부녀자 우선 구조 규정인 ‘버큰헤드’도 작동하지 않았다.
1852년2월27일 600여명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로 향하던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드(Birken head)호가 케이프타운 근처에서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기전 함장의 지시에 따라 먼저 여자와 어린아이를 3척뿐인 60인용 구명보트에 태웠다.
약간의 자리가 남았지만 사람이 더 탔다가는 구명보트가 위험해 질수 있어 470여명의 병사들은 구명보트 타기를 포기하고 전원 사망했다. 이후에 버큰 헤드규칙이 생겨 해난사고시 여자와 어린아이를 먼저 구조하게 됐다.
그런데 세월호는 여자와 어린아이가 먼저 아닌 선장과 선원 먼저 빠져 나왔다. 직업적 책임감이 있는 선원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선장의 모습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2003년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도 기관사가 먼저 살아남기 위해 객실 출입문과 전동차 전동장치 키를 빼내 도망갔다. 위기 상황에서 책임지고 지휘해야 했던 기관사의 도주로 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채 지하철 문을 열지도 못한채 연기로 질식사했다.
인재에 의한 참사는 우리 사회에서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대책 마련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공동체 의식에 따른 책임감을 갖는 분위기도 함께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