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은 무기력한 사람, 그러나 이성적 존재’
프랑스 문학가이며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은 그의 저서 팡세(pensees)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지칭하며 자연계에서 가장 약한 존재이지만 ‘사고(思考)’할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인해 존엄한 존재라고 밝히고 있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발병이 시작된 코로나19로 13일 미국에서만 하루 코로나 확진자가 무려 21만 명, 누적 확진자가 1,669만여명이며 사망자도 3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국내도 13일 현재 1일 확진자가 1천명을 넘어섰고 사망자580명이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누적 사망자가 무려 160만 명을 넘어섰고 있지만 누그러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겨울철로 접어들면서 점차 확산추세를 보인다. 끊임없는 사고와 발전을 통해 자연계의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한 인간은 언뜻 보기에 강한 것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죽어가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이다.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이 격언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서 단 한 명도 없을 터이다.
코로나19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우매와 무기력함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2019년 10월 미국 내 일부 전문가와 기업 관계자들이 백신이 없는 전염병 창궐 시 사망자와 확진자 수를 다룬 시나리오를 작성한 바 있는데 이들이외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을 누구 하나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유명영화감독인 김기덕 씨가 국내에서 미투 논란이 일자 해외로 출국한 이후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입원 후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현실이 될 수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 지옥문 위 중앙에 배치 ‘무엇을 생각하는가’’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그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위대한 존재이지만 비참함을 의식하는 것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언급하며 무기력한 이성만을 믿지 말고 인간 차원보다는 높은 그 이상의 것을 마음을 다하여 찾으라고 경고하고 있다. 파스칼이 말한 인간 내면의 위대함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 창작물 중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은 학교 교정의 화단이나 공원, 도서관 등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의문을 품지만, 막상 그 의문에 깊은 생각을 하며 풀어낸 사람은 많지 않다. 프랑스의 천재 조각가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 상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로댕의 ‘생각하는 조각상’은 단일 조각상이 아니다. 작가가 제작 의도를 밝히지 않았더라도 전체적인 작품 안에서 조각상의 위치를 알게된다면 조각상의 인간이 무엇을 고뇌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로댕의 생각하는 조각상은 지옥문이라는 조각작품의 위 중앙에 설치되어 있다. 1880년 로댕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신축된 장식미술관 입구에 청동 문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당시 단테의 ‘신곡’에 심취해 있었던 로댕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을 소재로 수백 개의 드로잉과 습작을 거쳐 지옥문을 제작했다. 비록 정부의 의뢰 취소로 ‘생각하는 조각상’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지만, 최고의 걸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옥문의 인물상에는 인간의 욕망과 쾌락, 절망과 공포 등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있는데 지옥문 제일 위쪽에는 ‘세 망령’의 조각상이 있고 바로 아래 중앙에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이 자리를 잡고 지옥에 떨어지기 전의 고뇌하며 고통받은 인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은 신곡의 저자 단테를 표현한 것이며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고뇌하는 로댕의 정신적인 자화상을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생각하는 조각상 아래 지옥문에는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200명 정도의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에 의해 처음 지은 바 된 아담의 배우자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류에게 죄를 짓게 한 이유로 부끄러움과 회한을 느끼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몸이 축 늘어져 죽음을 기다리는 절망감을 나타내고 있는 ‘다나이드’와 죽은 자식을 하나씩 먹어 치우는 ‘우골리노’와 ‘세 망령’의 조각상도 찾을 수 있다.
‘옛사람이 구하던 도(道), 진리 발견자만이 영원한 세상에서 행복누려’
로댕의 지옥문의 배경이 된 단테의 신곡 지옥문의 서두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진저‘라고 경고하고 있다.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현세와 사후의 세계를 크리스천의 시각에서 표현한 것으로 단테는 인간을 세 부류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신을 찾아내 섬기는 부류로 이들은 분별 있고 행복한 사람이며, 두 번째 부류는 신을 발견하지 못해 찾으려 애쓰는 사람으로 분별은 있으나 불행한 사람이라고 분류했다. 마지막은 신을 찾지도 않고 발견하지도 못한 부류로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으로 지칭하며 단테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로댕의 생각 하는 사람 조각상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결국 신을 찾고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지옥문 앞에서 고뇌하고 있는 조각상을 통해 로댕은 이 고뇌의 주인공이 바로 ‘나’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결국 한 번은 죽고 현세를 향유하는 사람 중 사후 세상의 존재에 대하여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길 바라며 말이다. 신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죽음 이후 영원한 세상은 우리에게 한번은 다가올 실재라는 것이 단테나 로댕이 신곡과 조각상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임이 틀림없다.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은 지옥에 떨어진 후에는 고통받는 가운데 있는 이들을 구원하지 못함을 알고 있기에 지옥문의 앞에 서기 전 구원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현세에서 선하고 악하게 살아가는 것이 사후 세상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큰 오류이자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이다. 사후세계 영원한 세상에는 천국과 지옥 오직 두 종류만이 존재한다. 인간의 기준에나 적합한 적당한 의인은 절대 선의 공간인 천국에 억겁의 시간을 노력하여도 결코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천국과 지옥 갈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의 논리와는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기준은 존재하지만 준비한 자만이 갈수 있으며 지옥은 아무런 준비치 않은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논어 이인 편에 ‘조문도 석사가이(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이 있다.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이다. 도(道)는 특별한 사람이 기행을 일삼으며 닦는 것이 아닌 길을 뜻한다. 다시 말해 길을 깨닫는 것이 ‘도’인 것이다. 무슨 길을 말하는 것인지 알겠는가? 진리의 길이다. 그 길이 ‘도’이며 진리이고 생각하는 조각상이 사유했던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찾지 않아 가지 못한 길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삶의 덧없음과 비참함을 깨닫기 좋은 시기이다. 무기력한 이성만을 믿지 말고 인간 차원보다는 높은 그 이상의 것을 마음을 다하여 찾길 바란다. 로댕이 지옥문 앞에서 말하고자 했던, 고뇌하는 사람만이, 찾고자 하는 사람만이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