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Diaspora)와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의미 고유명사’
나치의 유대인 600만 명 대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 유대인 전 세계 이산을 의미하는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 환란사를 뜻하는 이들 두명사는 고유 명사로 역사에 자리 잡았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는 BC586년, 바벨론 느브갓네살왕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왕과 귀족을 비롯해 백성 대부분을 포로로 끌고가 노예로 삼은 바벨론 유수 시대(70년)에서 기원을 찾는 시각이 우세하다. 유대인들은 70년의 바벨론 유수 시대가 끝난 이후 폐허가 된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페르시아 고레스왕의 칙령에 따라 스룹바벨의 지도로 1차 약 5만 명이 귀환했고 2차와 3차는 소수만이 귀환한 채 상당수 유대인이 바벨론지역에 남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지배를 받아 약 600년 동안 피지배국으로서 살아왔다. AD70년 로마 타이터스 장군은 유대인들의 절기 기간중 예루살렘을 포위해 수개월 동안 고사 작전을 펴 12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고 살아남은 약 78,000명은 포로로 잡아가 로마의 콜로세움을 건축하는데 투입했다.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펴 오던 유대인들은 로마 하드리안 황제 때에 이스라엘 땅을 강제적으로 떠나야 했다.
유대인의 집단학살은 1,900여 년 동안 자행됐는데 십자군 전쟁(1096년~1272년) 때는 예수를 죽인 악마의 자식이라는 이유를 들어, 1348년부터 1349년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는 흑사병의 원인이 유대인 때문이라는 이유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의 유대인이 조직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한 국가의 이산이 디아스포라라는 고유 명사가 되기까지 그들이 겪은 참혹한 환란사는 “바닷물을 먹물 삼아도 다 쓸 수 없다.” 는 표현이 부족할지 모르겠다.
‘디아스포라 학문적 의미 확장, 고국떠나 규범과 관습 만들어 공동체 집단에게 적용’
‘디아스포라’에 대한 의미가 확장되면서 학문적으로는 ‘본토를 떠난 사람들이 스스로 규범과 관습을 만들어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을 칭하게 됐다고 하여 이러한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에 한국의 ‘디아스포라’를 쉬이 비교할 수는 없다. 출애굽 후 광야 생활 중 유대인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 불순종 시 내리는 무시무시한 징벌의 실재였던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와 달리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이산)의 원인은 국가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한 이유로 인해 국민이 받아야 했던 고난의 삶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는 전 세계 175개국 약 72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흩어진 국가 수로 한다면 유대인이 흩어져 살았던 국가 수보다 월등하게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재외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국가는 미국(220만 명)과 중국(250만 명)과 일본(90만 명)이며 약 80%를 차지하고 캐나다와 카자흐스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원을 원나라 시대에 공녀로 끌려가 현지에서 고려인들의 공동체 마을을 형성해 살면서부터로 본다면 한인들의 본격적인 디아스포라는 일제 침략기 36년 동안 일본의 압제를 피해 독립운동과 경제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북 지방인 간도(당시 간도 인구의 약 76% 차지)로 이주해 가거나 소련의 연해주로 이주해 가면서 일 것이다. 소련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 등지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적으로 이주당한 한인들 거의 절반 이상이 춥고 배고픔으로 죽었고, 일제 침략기에는 징용으로 끌려가 죽거나 현지에서 돌아오지 못한 한인들이 조국을 등지며 이산의 삶을 살아갔다. 일제 침략기 전후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과 멕시코 농장으로 이주해 갔으나 노예와 같은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이주의 삶을 살아왔던 한인들과 6.25사변 전후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을 떠난 한인들. 그들중에 쿠바 한인으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여하고 쿠바에서 산업부 차관을 지낸 임은조씨( 쿠바명 헤로니모 임)의 이주의 삶은 한인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제2의 유대인이라 창함 받은 한국인만의 유전자 특성, 위기시 협력 국가번영 이뤄내’
한국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외침으로 어려움을 당해 왕이 백성을 버리고 도주할 때도 백성들이 일어나 외세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는 이타적인 성향을 지닌 민족이다. 일제 침략기에도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주도의 독립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IMF시기에는 국민이 자진해서 국가의 빚을 갚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펼쳤으며 이것은 일본 침략기에 일본에 진 빚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한 결이다. 국가 위기시 국민이 나서서 외세에 저항하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가질 수 있는 민족은 지구상에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가가 위기 시 활성화되는 유전자적 특징과 행동 패턴은 한국인만의 유전자적 특징일까? 아니면 환경적인 영향에 따른 것일까?
실제 다른 민족과 차별화할 수 있는 한민족의 유전자의 특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단국대 김욱 교수는 동아시아인을 표본 집단으로 부계를 통해 유전되는 Y염색체의 유전적 변이를 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주로 몽골과 동 · 남부 시베리아인 등 북부지방의 유전자와 동남아시아 및 중국 남 · 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부지방의 유전자형이 모두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를 뒷받침한 것은 강릉대 남궁용 교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홍성수 박사팀 등이 미토콘드리아 DNA(mtDNA)를 통한 유전적 특성을 연구한 결과 한민족은 최소한 26개의 혈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단일민족이라는 의미는 이러한 혈통을 지켜 왔다는 의미로 이같이 유전적 다양성의 집단은 단순한 집단에 비해 집단의 안정성이 높고 진화에 유리하다는 유전적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다양성을 갖춘 한국인의 유전적 특성이 현재의 K-Pop과 K-방역, 한류와 한식문화를 비롯한 세계정상급의 여자골퍼들, 세계10위권의 경제강국과 군사대국 그리고 오늘날의 촛불문화를 이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온 유대인들이 어떻게 선민의식과 유대인의 공동체 의식과 정체성을 지켜왔는지에 대한 답은 시나고그(Synagogue)라는 회당에서 찾을 수 있다. 유대인들은 BC586년 바벨론 포로 기간 중 바벨론 지역에 시나고그를 처음 만들어 유대인들의 만남의 장소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을 배우는 교육의 장소이며 신앙의 훈련장이며 경제적인 지원, 문화의 공동체적인 삶의 중심이었다. 수천 년의 디아스포라 삶 속에서도 유대인으로서 선민의 정체성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시나고그를 통한 공동체적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와 환란 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로 묶어낸 신앙의 공동체인 시나고그를 통해 현지의 뛰어난 적응 능력, 고난을 극복하는 정신력, 그리고 유대인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통한 경제적 능력 향상과 뛰어난 상호신뢰성이 갖춰져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민족으로 성장이 가능했다.
한국의 재외동포들이 이주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유대인의 시나고그와 같은 형태의 한민족 고유민속과 민요 등의 배움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있는 정부차원의 지원책이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