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두 종류, 구원받은 자와 받지 못한자’
기독교인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믿음의 길에 있는 사람이나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항상 마음에 남아 있는 의문이며 궁극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기에 의문점이 많다.
그리 원하는 믿음의 길을 가기를 원하지만 가기가 결코 쉽지가 않는데 그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직 성경의 믿음 위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 하지만 가장 가까운 나룻터에 서 있으면서도 강을 건넌 것으로 착각하는 상태로 이 부류는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근본이며 시작점인 ‘영혼 구원’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할수 있다. 대학을 입학을 하지 않고 스스로 해당 대학 학생으로 생각하는 부류들이다.
이런 상태에서 믿음 생활은 율법주의적인 자기 열심에 의지하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상태로 흔들리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열심을 바탕으로 칭찬받기를 즐겨하는 성향이 있다. 성경적인 믿음과 관계가 없다.
또 한 부류는 성경의 믿음의 근본이며 시작점인 영혼 구원을 받았지만 믿음의 길에서 자주 벗어나거나 믿음의 숲에서 방황하는 부류들. 이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 믿음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거나 ,세상과 타협함으로 믿음의 길을 가기 싫어하며 그 맛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할수 있다.
‘믿음의 길, 십자가에 내가 못 박힌 것 받아들인 것에서부터 시작’
믿음의 근본인 영혼구원을 받은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의 결여와 함께 본인의 삶중 일부는 믿음의 삶에 걸치고 일부는 세상적인 것에 걸치는 이중적인 삶의 태도가 원인이 된다. 이런 삶은 결코 성경의 기록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족적을 따라가는 믿음의 삶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태가 되지 않는다면 믿음의 길에 서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믿음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의 삶’과 ‘나의 운명’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한다. 천국가는 믿음(영혼구원)을 소유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인해서 이다. 누구나 아는 복음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의미는 구원받은 크리스찬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마음에 인정하며 그와 같이 살려 행함으로 노력하며 내 안에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믿음의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 법적 소유권은 주님으로 인정치 않는 것이 불법 ’
만약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내가 못 박힌 것을 의지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행함으로 부인한다면 결과적으로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부인하는 삶이 된다. 이 삶은 내 안에서 주님이 사는 것을 부인하는 ‘내 것은 내가 주장’하는 삶이기에 믿음의 길이 아니다.
구원받은 이후 믿음의 삶을 말하고 있는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것도 마음에 있는 믿음을 행함으로 드러내야 그 믿음을 알수 있다는 의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믿음이 있기에 반드시 믿음으로 행함이 나올 것을 말하고 있다.
성경 고린도전서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영생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주님의 피 값으로 샀으니까, 법적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소유의 삶’이 아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예수님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믿음이며 법적 소유권의 주장에 맞는 삶이다.
그러면 믿음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자. 믿음이라는 단어는 똑같지만 그 단계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며 내용이 다른 것임을 이글을 통해 알수 있을 것이다. 계단은 서너 계단을 밟고 올라갈수 있지만 믿음이라는 계단은 건너 뛸 수가 없다.
믿음에 대해 로마서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은 믿음은 믿음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믿음은 크게 두 종류로 말할수 있다. 근본적인 믿음 즉 천국갈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나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를 무시한 믿음은 기초가 없는 것으로 영원한 세상에서의 그 결과는 참담하게 된다. 그래서 이세상에는 영혼 구원받은 믿음 소유자와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두 부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선진들 방법론적 삶 조명'
믿음이란 무엇인지 다시 살펴보자. 믿음의 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그 답이 있는데 믿음의 선진들의 구체적 사례를 통해 믿음의 방향을 잡을수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영생을 얻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믿음으로 사는 방법론적인 삶을 제시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는 의미는 노아의 방주 예비가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 세상의 환경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으나 당시 세상에서 노아의 방주 예비는 믿음이었음을 알수 있다.
노아 당시 세상은 현재의 지구 모습과는 달리 하늘에 물층이 존재해 햇빛의 해로운 광선을 모두 막아주었기에 지구는 남북극이 없었고 지구 전체가 온난하여 동식물이 살기에 가장 최적의 기후와 환경을 유지했다.
당시 식물이나 동물, 사람에게 물 공급은 지금처럼 바닷물이 증발하여 빗방울이 떨어지는 물순환 시스템이 아닌 지하의 물이 안개를 통해 수분을 공급했다. 그러므로 노아시대까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진 적이 없었고 1대양 1대륙 시기였기에 노아가 살던 곳은 바다와도 먼거리에 있었다.
그렇지만 노아는 홍수심판이라는 보지 못한 일에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믿음으로 방주를 지어 그 집을 구원했다. 보지 못한 일에 대한 경고를 받아들인 노아는 방주를 짓기까지 120년동안 믿음대로 행했다. 여기에서 믿음을 엿볼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의심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으로는 믿지만 믿음의 내용을 실천할 행함이 없다면 그것을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도마처럼 믿어야 할 대상을 믿음으로 보지 않고 직접 보기 전에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현 시대의 모습이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는 뜻은 천국을 보지 못했지만 내 안에 소망이 있고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직접적인 믿음의 증거라는 것이다.
노아의 믿음은 의인으로서 믿음이다. 창세기에 노아는 의인이며 당시에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서 의인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완성한 것은 믿음이 온전했기 때문에 120년동안 흔들리지 않고 가능했다. 온전한 믿음이 가능했던 것은 노아의 마음속의 소망이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기반위에 세워져 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