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변태 나비, 재창조 과정 경이롭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의미가 함축된 명사형이다. 자연이 스스로 동물과 식물과 지구와 우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생명체를 만들었다고 본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자연이 창조에 의한 피조물이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상당수 사람의 태도가 돌변하여 열렬한 진화론자가 된다.
단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공부한 정도의 지식으로 진화론을 옹호한다. 교과목에 게재된 사안은 충분한 검증을 거친 법칙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자연의 신비중 곤충의 완전변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경이로움에 입이 딱 벌어진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과거의 모습과 식성이 완전하게 재창조된 나비를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곤충은 완전변태(갖춘탈바꿈)와 불완전 변태(못갖춘탈바꿈)로 나뉜다. 딱정벌레나 벌과 개미, 나방과 나비, 파리와 모기 종류 등은 완전변태를 한다. 완전변태는 곤충이 알에서 깨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된후 번데기에서 성체가 된다.
보통 완전변태를 거치는 곤충은 번데기에서 성충인 나비까지 5일에서 14일이 걸린다. 보통 상식으로는 번데기가 된 애벌레는 번데기 안에서 애벌레 생체에 덧붙여 날개가 생겨나고 다리와 꿀을 먹을수 있는 입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번데기 안에서 스스로 죽어, 액체된 후 나비된 애벌레, 창조의 신비’
번데기를 만든 애벌레는 산성인 소화효소를 스스로 내뿜어 애벌레인 자신을 액체 상태로 녹여버린다. 애벌레 모습이 완전하게 사라진다. 번데기를 자르면 덜 자란 나비가 아닌 액체가 쏟아진다. 번데기 안의 거의 완전한 단백질 액체는 성충이 될 때 필요한 기본 세포만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성충원기’라 한다. 세포는 당연히 눈으로 볼수 없다.
성충원기는 액체화된 번데기안에서 세포분열을 일으켜 나비로 성장하게 된다. 성충원기는 액체가 된 단백질의 도움으로 성장하기에 성충으로 재창조된 나비는 애벌레에 비해 약40% 질량이 감소한다.
애벌레의 형체가 사라지고 기본 세포만 남아 재창조된 나비는 식성도 다르며 모습도 전혀 닮지 않았다. 현재 알려진 100만종이상의 동물중 완전변태를 하는 곤충이 60%를 차지한다고 한다.
‘진회론으론 설명불가, 우연히 나비되어도 후천적 형질은 유전못해’
어떻게 애벌레는 번데기 안에서 생체가 죽어서 나비가 되는 과정을 거쳤을까? 진화론자나 무신론자들은 우연한 기회에 애벌레 한마리가 번데기를 만들어, 우연히 소화효소를 뿌렸는데 자신을 녹였고 우연히 성충원기가 남아 우연히 나비로 성장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과정에 필요한 시간을 수천만년이나 수억년쯤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주장이 옳다고 일단 인정해 보자. 그러면 후천적으로 획득한 형질은 후손에게 유전되지 않는다는 유전법칙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진화론은 시간과 우연이외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비의 생태 과정은 창조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하다. 지금의 과학으로도 번데기에서 나비 과정을 재현하지 못한다.
곤충학자 캘로 윌리암스는 번데기 4마리중 한 마리는 그대로 두고, 다른 한 마리는 절반을 절단하고, 또다른 한 마리는 절단된 단면에 튜브를 끼여 성장 과정을 살펴봤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절단후 튜브를 끼여 튜브안에 다른 액체를 넣었다.
어떤 실험체가 나비가 됐을까? 물론 1번과 절단후 튜브를 끼여넣은 실험체이다. 튜브를 끼여 넣은 나비는 성체가 됐지만 날개짓으로 튜브가 빠져 죽었다. 잔인하다.
이 실험의 목적은 단백질의 역할과 성장 과정이다. 액체화된 단백질내 성체의 세포가 남아 성장한다.
‘완전변화된 나비 애벌레때 기억, 나비되어서도 기억한다’
생물학과 마사 웨이브 교수는 에벌레 때의 기억을 성충이된 나비가 기억을 함을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뇌 구조와 신경조직이 완전히 새롭게 조직되었는데 어떻게 기억이 유지되는지 알수 없다. 마치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만 육체를 벗어난 영혼이 과거의 모든 일을 기억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나비의 재창조는 성경의 거듭남과 부활의 비밀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성경에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한다”며 거듭남은 육체가 아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한다. 그러면 성경을 통해 거듭난 사람은 두 번 태어나는가? 맞다. 두 번 태어난다. 두 번 태어나지 못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남을 중생이라고도 한다.
엘머 타운즈는 그의 저서 평신도조직신학을 통해 중생(重生)의 정의를 “신앙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내면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 있도록 성령께서 새로운 성품을 부여하는 역사”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는 의로운 일들을 행할수 있는 능력을 사전에 주고 실행토록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이룬 거듭남은 갈라디아서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 로마서에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영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선포했다.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 새로운 심령과 하나님에 의해 재창조’
고린도후서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의미는 영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됐음을 말한다.
마치 나비가 번데기안에서 완전히 죽은 다음 나비라는 새로운 창조물이 되듯이 예수안에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성경 에배소서에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라고 기록했다 이를 보완해 골로새서에 ”옛사람과 그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하심을 받은 자니라“고 기록했다.
거듭난 자는 영적으로 십자가에서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로운 피조물인 거룩한 새사람이 진짜 나라고 설명했다. 중생의 정의와 일치한다. 거듭남의 비밀은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의 새사람의 비밀이기도 한다.
번데기를 통해 재창조된 나비는 새로운 몸으로 꿀을 먹고 나무의 진액 등을 먹는다. 물론 게중에 동물의 똥을 먹는 나비도 있다 한다.
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이미 거룩한 뜻을 이룰수 있는 힘이 내재된 상태임에도 세상일에 집착하게되면 재창조된 나비가 동물의 똥을 먹듯이 그리스도인도 썩어 없어질 헛된 일을 좇게됨을 교훈으로 준다.
로마서는 창조물인 자연의 경이로운 이면에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깃들어 있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