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영혼구원 –불교의 해탈, 모두 죄악으로부터 구원’
기독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문맹(文盲)이라 할지라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죄 용서함을 통한 구원을 받는다. 반면 불교의 해탈은 무아(無我)상태가 되는 정신 현상이기에 소수가 수행에 참여하고 소수중 깨달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기독교의 구원과 불교의 해탈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이며, 해탈일까? 양측 모두 내면을 들여다 보면 구원과 해탈은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을 알게 된다.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죄악의 처리 방법이다. 추구하는 최종 목표는 죄로부터, 욕망으로부터 자유함으로 동일하나 결과에는 큰 차이가 난다.
기독교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다. 그래서 구원을 속죄함 즉 죄 용서함이라 한다. 기독교 구원은 영혼 구원이며 육신의 구원은 예수 재림때 이뤄진다.
영혼 구원이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뤄진 인간이 죽으면 ‘나’의 실체인 영혼이 몸과 분리된다. 그 영혼이 진짜 ‘나’다.
‘나의 실체는 영혼, 죽음은 영혼과 육체 분리’
3500년전에 욥기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는 기록이 우리 시대 뇌 과학과 신경과학, 첨단 장비 등의 도움을 받아 사실로 밝혀졌다. 죽었다 깨어난 임사 체험자들은 죽음이후 육체로부터 영혼 이탈 현상과 순식간에 평생의 삶이 계산됐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인격체인 빛을 만났다는 공통된 증언은 성경과 동일한 내용이다.
굴레나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해탈(解脫)은 불교에서 열반과 함께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해탈인가? 윤회로부터 해탈이다. 윤회(輪廻)는 바퀴가 돌 듯이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었다 죽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순환과정을 말한다.
윤회는 원래 인도 원주민 토속종교에서 출발해 힌두교가 받아들였고 한국불교의 윤회도 힌두교에서 가져 왔지만 힌두교의 윤회와는 약간의 차이가 난다. 인도의 윤회는 신분간 계급 차이가 엄격한 카스트제도의 합리화를 위해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하다.
‘불교 윤회, 업과 고락으로부터 자유함, 무아상태’
한국 불교의 윤회는 중생의 번뇌와 업(業) 때문에 삼계육도의 생사(生死) 세계 순환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몇 겁이나 몇 억겁의 세월을 걸쳐 계속된다는 이론이다. 해탈은 이러한 윤회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또 하나의 윤회는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고락의 윤회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즐거움인 락(樂)의 본질을 괴로움(苦)이며 이것의 뿌리가 욕망으로 본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아 고와 락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해탈은 고와 락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의 경지를 말한다. 고가 완전히 소멸됐다는 의미에서 열반이며 반야(지혜)라 부르기도 한다. 두 종류의 윤회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가 해탈이다.
불교는 철저하게 개인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 고와 락을 벗어난 상태를 해탈이라면 고와 락은 ‘나’라는 자아가 사라진 상태여야 가능하다. 자아가 존재하는한 고와 락은 반드시 삶에서 되풀이된다. 불교는 고와 락에서 벗어난 상태를 무아(無我)라 부른다.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무아상태 오랜시간 수행으로 가능할까? 좌뇌 자극만으로 해탈 상태가능’
그런데 무아 상태나 만물과 일체가 되는 해탈의 정신 현상은 좌뇌의 자극만으로 그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뇌과학과 신경과학에서 이미 오래 전 입증된 사실이다.
수련을 통해서 진정한 무아 상태가 인간에게 가능한가? 다른 측면에서 물어보자. 인간은 죄성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릴수 있는가?
우선 기독교의 구원을 좀 더 살펴보자. 기독교의 영혼 구원은 신구약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다. 구원은 인간 스스로 이룰수 없다. 왜 없을까? 죄 값을 스스로 치룰려면 죽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죄의 삯은 죽음이다. 헌금이 아니다. 행함이 아니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니 피를 흘려 죽어야 한다.
성경은“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했다. 만물중에 인간의 마음이 가장더럽다고 했다. 죄 때문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는 이유는 마음의 죄성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자아, 새로운 자아 입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로부터 구원이다.
갈라디아서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로마서에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기록했다.
옛사람과 나는 자아를 의미한다. 자아중 옛 자아 OLD SELF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때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성경을 밝히 말한다.
그러나 불교와 달리 무아가 아니다. 죄성에 물든 옛 자아는 죽었고 창조주와 같은 새로운 자아 NEW SELF를 입었다고 골로새서에 기록됐다. 거듭난 그리스도의 육적 영적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만이 창조주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갈수 있고 진리를 통해 자유로움을 가진 거룩한 모습이기도 하다.
불교의 해탈은 고와 락, 생사의 무한 반복으로부터 모두 벗어난 자유로움을 말한다. 그러면 사람에게 고락은 왜 생기는가? 그것은 욕망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근저에는 육체의 본능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죄의 본능이다.
‘불교의 무아 무엇이 유익한가? 죽으면 무아 증명 어떻게 할 수있나’
육체의 본능은 육체가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며 반드시 존재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필수요소이다. 식욕과 수면욕과 번식욕 등이다.
무아가 되면 육체의 본능에서 벗어난다는게 불교 철학이다. 육체의 생명에 필수요소인 수면과 먹어야 하는 기본욕구가 사라지면 사람은 죽게 된다.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본능에서 벗어 나는데 한계가 분명 존재함을 의미한다. 완전무아까지 이르는 수행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육체의 저항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불교 수행자는 무아의 깨달음을 얻기를 원한다. 무아 상태가 되면 스스로에게 무엇이 유익한지 묻지 않을수 없다. 마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몸은 죽는다. 스스로 믿든지 아니 믿든지 죽음 이후 심판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치상으로도 이게 맞다.
수행자가 어떠한 정신 현상에 도달해도 죽음을 피할수 없다. 죽으면 깨달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증명할 방법이 없다. 모두 죽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부터 모든 불교 수행자가 죽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다르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아프리카든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만 영혼 구원이 가능하다. 마음에 이뤄진 사실이 동일하기에 언어만 통한다면 생각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신앙이다.
‘하버드대 신경학 질 볼트 테일러 좌뇌 출혈로 물아일체와 무아상태 이뤄’
66권의 성경에는 물질적인 증거가 기록돼 있고 이 증거를 통해 성경을 믿게 되면 성경에 기록된 영적 사실을 믿게 된다. 전혀 의심이 없이 말이다. 기독교 구원의 실익은 창조주와 영원토록 천국에서 영생한다는 점이다.
불교의 해탈이든 기독교의 구원이든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게 목적이다. 기독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를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고 규정했다. 죄로부터 자유함이 인간의 진정한 지유함이다.
불교의 수행은 노력하면 할수록 마음이 밝아져 아주 작은 욕망까지도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그 괴로움은 인간의 노력으로 없앨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더욱 수행에 정진한다. 죽을 때 까지 말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인생길에서 반복 순환되는 이유는 인간의 길 자체를 고와 락이 순환토록 창조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자아가 사라지면 고락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겠지만 무아가 되려면 육체가 죽어야 가능하다. 죽지 않고 자아를 무아로 만들 방법은 하버드대 뇌신경해부학자 질 볼트 테일러가 겪은 죄뇌출혈밖에 없다.
테일러는 뇌출혈 당시 내가 우주와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았고 인간이 어떻게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지 해부학적 관점에서 이해할수 있게 됐다고 고백했다.
기독교의 자유함은 죄로부터 벗어난 그리스도인이 누리면서 산다. 그러나 불교의 해탈을 누리고 있는 수행자는 현재 존재하는가? 글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