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계는 형벌 목적 아니다, 확대 해석된 가르침 성도간의 비판(judge) 원인’
성경의 징계를 확대 해석하고 강조하면 고난을 겪는 성도를 위로하기 보다는 비판(judge)이 앞서면서 성도간의 사랑이 약해진다. 성도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보이지 않는 튼튼한 끈인 사랑이 약해지면 목적을 향해 달라가는데 비끄덕거린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가족이나 친족, 지인이 죽거나 큰 병에 걸리거나, 다치거나, 사업 실패의 위기에 처한 성도에게는 무엇보다 큰 위로가 필요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전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처럼 서로 비판(judge)해서도 안된다. 상대의 잘못을 판단하는 행위가 비판이다.
야고보서에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비판을 금했다. 예외가 없다.
어려움에 처해 있는 성도에게 그동안의 삶을 돌이키라는 권면은 징계를 염두에 둔 비판이다. 징계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형제를 판단할수 있는 분은 입법자와 재판자인 하나님이외 없다. 성경은 스르로 허물을 깨달을 때 하나님 앞에 돌이켜야 한다.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 형벌로서 징계라고, 아니다 성화의 목적이다'
징계를 형벌로, 처벌만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은 잘못됐다. 신약의 ‘징계’는 성화과정의 훈육과 연단을 기반으로한 하나님의 사랑하에서 이뤄진 훈계이다.
신약 성경의 징계 사례를 살펴보자. 음행한 고린도교회 성도의 죽음과 땅값을 속여 성령을 속인 아나니라와 삽비라의 죽음. 고린도교회에서 성찬을 경히 여기는 성도가 병에 걸리거나 죽었다. “초달을 차마 하지못하는 자는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한다”는 잠언과 신약의 징계 사례를 표면적으로 살펴보면 모두 형벌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한 훈육이다.
이런 류의 사례를 통해 징계를 회초리나 심하면 죽임도 당한다는 생각에 빠졌다면 심각한 신앙의 오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봐야 한다. 징계(懲戒)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이나 허물 등을 나무라서 벌을 내리거나 제재를 가한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의 의미로 성경의 징계를 해석하면 오류가 생긴다.
히브리서 12장의 ‘징계’는 NIV에 discipline으로 형벌의 가한다는 의미보다는 교육의 훈련 의미가 더 강하다. ‘징계’의 고대 헬라어 원어는 파이데이아(paideia)로 처벌이 아닌 교육적 훈련과 연단에 가까운 개념이다.
‘징계 헬라어 ’파이데이아‘, 교육과 훈련, 그리고 교정의 의미’
파이데이아는 3가지 의미를 가진다. 교육(training)은 어린이를 가르치는 과정, 훈련( discipline)은 성장을 위한 연단을, 교정(correction)은 바른길로 인도하는 과정을 말한다. 모두 사랑의 개념이다. 성경은 징계의 목적을 의의 평강한 열매에 둔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징계는 처벌의 목적이 아니다.
징계에 얶매인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성장해 갈수록 죄에 아주 민감해 지지만 한편으로는 징계를 두려워 한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집중하는 대상에 민감해 지기 마련이다. 죄에 집중하면 죄에 민감해지기마련이다. 죄는 징계를 생각나게 하기에 성령의 인도보다는 죄에 집중하면서 이겨내려 한다. 신앙이 매우 성장한 사람의 특징이리라고 생각할수도 있으나 성경과 하나님을 오해에서 비롯됐다.
예수께 받은 그 큰 사랑을 항상 감사함으로 받으면 죄가 생각나지도 않고 할수도 없다.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지 집중하면 삶의 모든 방향이 사랑에 두면서 살아가기에 평강이 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
골로새서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가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기록과 요한복음14장과 20장에도 주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평강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명시했다. 평강은 징계를 옆에 두고 누릴수 없다.
‘구약과 신약의 징계 혼용해서 안된다, 구약은 유대인의 율법 준수여부’
‘신약 그리스도인-하나님과 사랑 근거한 징계, 기초가 다르다’
구약의 징계와 신약의 징계는 매우 큰 차이점이 있기에 동일선상에 두면 신앙에 혼란이 오게 된다.
구약의 징계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간의 계약에 따른 율법 준수여부에 뒀다. 율법을 어긴 대가인 징계는 민족간의 전쟁, 기근과 자연재해, 포로, 죽음 등이 주어졌다. 유대인에게 형벌성 징계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이 계속되면 징계의 수위는 처음에는 7배, 그다음에도 7배를 더하고 다시 7배를 또 다시 더하고 7배를 더했다. 무시무시한 징계다.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님께 순종시 정확하게 축복이 주어졌고, 불순종시에도 약속대로 저주가 퍼부어졌다. 계약에 따른 축복과 저주의 역사가 반복됐다. AD70년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면서 성전도 불사라졌다. AD135년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됐다. 전세계 강제 이산된 유대인 뒤에는 1900년동안 칼이 따라다니면서 죽음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성경대로 이뤄졌다.
구약이 선민 이스라엘의 기록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기록이다. 하나님과 성도간의 관계는 사랑과 은혜로 맺어진 인격적인 관계이다. 교회시대의 징계 목적은 연단과 성화이다. 구약의 징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구약의 징계와 신약의 징계를 혼용하게 되면 신앙적인 혼란이 온다.
마치 율법과 사랑을 섞어서 비빔밥을 만들 듯이 말이다. 율법과 은혜의 차이점을 알면서도 구약과 신약의 징계를 혼용해 사용함은 아직 율법과 은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마서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하나님의 후사”라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이다. 부자관계는 공의가 아닌 사랑의 관계이다. 징계는 반드시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징계를 두려워하는 것은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오해이다.
‘신의 성품 참여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상태 거룩여건이 갖춰졌다’
하나님은 분명히 육신의 고난을 허락하셨다.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케 되었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고난이 주어진다는 의미다.
죄의 형벌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해결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징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불순종에 아주 민감한 상태다. 영적으로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혹자는 죄에 민감해져야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을 한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다투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죄와 다투면 필패한다.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까? 죄를 피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선 중생의 의미를 살펴보자. 중생은 “신앙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내면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수 있도록 성령께서 새로운 성품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정의했다. 평신도 조직신학에서 정의한 내용이다.
성경 베드로후서에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은 신의 성품에 참예했다고 밝혔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기록과 함께 신의 성품에 참예, 새로운 성품을 묵상해 보면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실체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려면 첫째 거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주어져야 한다. 만약 우리 몸이 구원 받기전과 후가 동일하다면 말씀을 실행할 능력이 없기에 우리 몸으로 거룩한 삶을 살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할 수 있는 여건이 이미 주어졌다. 징계에 억눌려 있는 신앙이라면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하기 어렵다.
‘심령 새롭게 돼 하나님처럼 의와 진리로 새사람 됐다’
거룩은 심령이 새롭게 되지 않은 죄인의 상태에서 불가하다. 비록 죄용서를 받았다 할지라도 몸이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면 아직은 죄인의 성향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새롭게 했고 하나님같이 의와 진리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의 옷을 입었다고 밝혔다.
로마서에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었다”함은 그리스도인이 죄에서 자유로운 몸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영적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육간에 여전히 과거 죄인의 상태로 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성경 기록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함은 성경의 무지 때문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는 지적처럼 동일하게 적용된다. 구원받은지 수십 년이 지나도 죄와 다투면서 실족하는 신앙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에 그런다. 주어진 영적 상태를 안다면 죄와 다투지 않고 성령을 따라가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갈라디아서 2장에“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옛사람,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기에’
‘옛 본성 및 자아 중심의 정욕대로 살아온 old self, 이제는 new self 삶’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기록은 사실이다. 이 구절을 상징으로 판단하면 평생 죄와 싸워도 이길수 없다. 갈라디아서 2장은 복음을 깨달은후 바로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성경 말씀이다. 여기에서 ‘나는’ 옛사람이며, 옛자아이다. NIV에서는 old self라고 기록됐다. 옛사람은 구원받기 전 과거 육신의 정욕을 가진 자아이다. 옛 사람이다.
옛사람(old self)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을 때 옛사람도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신앙에 획기적인 변화기 시작된다. 매우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을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 신앙은 전과 후로 나뉜다. 황당한가? 경험한 사람은 모두 이처럼 말한다. 복음처럼 이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
이미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었는데 죄와 다툴 이유가 사라졌다. 갈라디아서2장은 매우 성경적이면서 하나님의 합리성과 이성적인면이 가장 잘 드러난 사랑에 근거한다.
고린도후서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의 뜻은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기에 새로운 창조물인 새로운 사람이 육신에 들어왔다는 내용이다.
‘옛자아가 죽은이후 그리스도께서 들어오고, ‘새사람(new self)인 내가 들어와'
옛사람이 죽고 난후 내 안에 새로운 창조물인 내가 먼저 들어온게 아니다. 텅빈 상태에서 그리스도께서 먼저 들어왔고 그런 이후 새사람인 내가 들어왔다.
순서를 기억해 보자. 내가 먼저 들어온후 그리스도께서 자리한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은후 내가 들어왔다. 엄밀한 의미에서 새로운 사람의 육체의 소유권은 그리스도다. 나중에 들어온 새로운 사람인 나는 소유권 2순위다. 법적으로 소유권 2순위란 의미다. 그이유를 보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너희 몸은 태어날 때 가진 창조의 육체인 겉사람과 거듭난 속사람을 의미한다.
대속의 피 값으로 주께서 사셨다. 새로 창조된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 복음이 완성되면서 옛사람이 죽으면서 들어왔다. 내 몸의 주인은 그리스도라는 기록은 상징이라고 하면서 한쪽 귀로 듣고 흘러버릴 말씀이 아니다. 실증적이면서 실제적으로 나에게, 즉 그리스도인에게 이뤄진 사실이다.
‘징계는 사랑의 하위 개념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의 적용받는 그리스도인’
새사람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징계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묵상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며 동행하며 인도함을 알기에 과거의 내가 아니라, 변화된 내가 내 육신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성경 기록이며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다. 구원받을 때 만이 아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성령과 동행하는 생활에 집중하는 삶에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을 의지하게 되면서 징계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징계는 사실상 사랑의 하위개념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징계에 사라 잡혀 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은 망가진다. 로마서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는 의미를 새겨야 한다. 죄의 법아래 있지 않다고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됐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자유케 한다함은 죄에서 죽어 자유로운 상태’
로마서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는 기록도 마찬가지다.
옛사람은 죄성을 가진 아담의 후손으로 구원받기 이전의 옛 본성과 자아중심의 정욕대로 살아온 나를 말한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유는 죄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죽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죄에서 벗어나 의의 일을 위함이다. 옛사람은 이미죽어서 죄에게서 해방됐다. 더 이상 죄와 다툴이유가 없다.
로마서는 이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쉽게 설명했다.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된다. 너희도 그리스도 몸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열매 맺으며 살라고 말했다.
죄에서 죽어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서12장처럼 변화된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에 초점을 맞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