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의 기록이자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인 성경을 이데올로기(ideology: 관념idea과 논리logic의 합성어로 이념과 혼용)로 살펴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고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성경을 근거로 한 기독교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인 면 두 가지의 측면 모두를 갖고 있다. 십계명에 얽매인 종교적인 얼굴과 다른 한쪽에는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앙인의 측면 즉 양면성이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진보적인 면이 훨씬 강하다.
먼저 보수와 진보의 의미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보수주의는 진보주의를 상대하는 개념으로 성장해 왔다. 일반적인 보수주의는 과거로부터 전래되어 온 것을 지키려하고 자신이 믿는 체제에 대한 변화의 범위는 최소로 하면서도 느리게 천천히 적용하려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진보주의는 사회의 모순이나 불합리한 제도 등을 변화와 개혁을 통해 해결해 나가려는 것으로 인간의 정신이나 문명 등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이념을 말한다. 즉 진보주의는 변화를 의미한다.
'한국 기독교 150년 역사 불구 급성장'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866년 27세의 나이에 대동강 변에서 한문 성경을 평양시민에게 전해 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는 그 역사가 약150년의 짧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의 27.6%인 1,356만6천명(2015년통계)으로 대단한 급성장을 했다.
한국 기독교의 급성장한 배경에는 성경의 순수한 복음을 받아들여 신앙을 갖고자 한 것보다는 육신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제36년 치하에 이어 6.25전쟁, 보릿고개를 경험하며 시달리게 된 배고픔과 가난함을 교회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현실적이며 육신적인 문제 해결을 원했던 다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기독교는 순수한 복음을 전도하기 보다는 현실 문제 해결에 치중한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변해 갔다.
기복신앙은 자신의 명예와 소원 성취와 자녀들의 출세, 건강, 사업 번창, 부의 축적 등을 기원하는 현실 중심의 신앙이다. 기복신앙 뿌리에는 일제치하와 같은 잦은 외침과 6.25전쟁, 보릿 고개 등의 사회적 급변 시기에 생명과 재산의 위협과 체제의 불안과 남북한의 대치 상태를 겪으면서 변화를 꺼려하게된 사회와 개인의 안정을 원하는 보수적인 면이 자리 잡게 됐다.
'성경 목적으로 살펴 볼때 매우 진보적'
그에 반해 기독교는 외부에서 판단할 때 변화를 거부하는 전통적인 보수주의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성경의 기록된 본래 목적하에서는 기독교는 분명하게 진보적이다. 그것도 매우 진보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종교 경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보시는 인류의 역사서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로 사람의 근본이 무엇이며 그것에서 벗어나 더 나은 길을 갈 수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지만 성경을 종교의 교리를 기록한 경전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먼저 종교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자와 인간을 연결해 주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보이지 않는 절대자를 찾아가거나 절대의 경지에 이르는 여정이다.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등이 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종교를 믿는 자들은 금욕적이며, 율법적이며, 스스로 희생을 강요하는 자기희생적인 모습 속에서 정해진 틀 내의 삶을 스스로 또는 율법에 의해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종교에는 자기를 억제하는 기존의 틀 안에서 머물며 변화를 꺼리는 보수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단순하다.
사람이 주체가되어 신을 향해 나가는 것이 종교라면 기독교는 절대자가 이미 그 길을 열어 놓았으니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이며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신앙이며 인간이 본성적으로 원하는 영원한 생명인 천국의 길을 깨닫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지침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토속 종교 생활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기복신앙의 토속종교의 한 계파로 오인하며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아 율법에 의한 자기 열심으로 축복을 받으려는 종교인으로서 살아 간다.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반면에 십자가에서 모든 죄 용서함을 받은 신앙인으로서 거듭난 자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일 변화해 나가는 진보적인 삶을 살수 있다. 매일의 변화되는 삶은 어떤 정해진 틀이 아닌 진리를 깨달은 이후 오는 자유함 가운데 변화이니 진정한 진보라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거듭난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마음으로 받아 들인 자라고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먼저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은 후 그 죄로 인해 지옥 간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죄인임을 알게 된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게 되고 그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가 이미 용서됐음을 알게 된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거듭난 자라고 말한다. 육신으로 한 번 태어나고 두 번째 영적으로 태어난 자를 거듭난 자, 좁은 문을 통과한 자, 구원받은 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천국에 갈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경은 분명하게 요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너희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는 성경의 기록과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는 말씀처럼 성경은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쓴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는 구절은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예수 안에서 새롭게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할수 있다. 종교인과 차이점이다.
'성경의 진보 이유, 하나님의 사람 사랑 하심에 있다'
진보라는 것은 시대를 앞선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2000년전 성경의 주인공 예수님은 창조주이며 선생으로서 12명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동으로 그의 사랑을 실천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발을 씻기는 종이 가장 천한 종이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다.
또 제자들의 사회적 신분을 살펴보면 수석제자 베드로와 요한, 안드레는 이스라엘 지역중 천대받는 갈릴리 지역 어부였다. 당시 사회에서 천한 세리(세금을 거둬 로마에게 바치는 직업)인 마태 역시 사도로 불렀다. 당시 사회상으로서는 상당히 변화된 진보적인 모습으로 평가할수 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될 AD33년부터 AD100년까지 당시 사회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였다. 그러나 성경은 남녀는 창조의 목적이 다르듯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다르므로 동등한 위치에서 돕는 배필로서의 책임을 다하게 했다. 이 또한 당시 시대상으로 본다면 매우 진보적인 기록임을 알수 있다.
또 당시 사회는 신분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내에서는 부자나 가난한 자, 신분이 높은 자나 낮은 자를 구분하지 않고 서로 동등한 명칭인 ‘성도’(형제,자매)라 불렀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파격 그 자체로 받아들일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모습이었다.
성경이 이같이 시대를 앞서서 진보적인 이유는 시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이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신분과 남녀의 차이를 극복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그 이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짝으로 창조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결국 성경은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길을 열어 놓은 시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낸 진보적인 기록이다. 사랑은 모든 시대를 초월한 변화이며 진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