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선한 일 위해 지음받은 성도, 죄와 다툼 일상이 정상일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난제를 묻는다면 상당수는 ‘죄와 다툼’이라고 주저없이 말한다. 평생 죄와 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경적인 삶이라 할수 있을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당연할수 있는 그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요한복음은 상징에 그치는 기록이 아니다. 진리를 알고 난후에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할 정도로 자유롭다. 진리를 알고 난 후에도 진리를 알기 전과 비슷하게 죄와 다툼이 계속되면 ‘진리는 자유’라는 공식에 위배된다.
진리를 알고난 후 자유함은 무엇인가? 첫번째 자유함은 죄로부터 자유함이고, 두 번째는 세상으로부터 자유함이다.
갈라디아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그러하니라”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과 거리감 있는 존재들이다. 거리감의 다른 표현이 자유함이다.
죄로부터 자유함은 율법으로부터 죽은 자이기에 가능하다. 죄로부터 자유하고 율법에서 죽은 자인 그리스도인이 죄속에 살수 있을까? 보통 성도의 회개를 위해 인용하는 구절이 바로 요한일서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
사도요한이 1차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기록이다. 영지주의는 영지(Gnosis)를 얻으면 완전한 무죄 상태로 변하여 육체의 죄가 영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이단 교리다.
‘요한일서 1장의 죄의 자백, 구원받기전 사람을 위한 기록’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로마서는 아담이후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일러준다. 인간에게 죄성은 보편적 특성이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인 성경을 무시한 교리이기에 이단이다.
요한일서의 죄를 자백하는 죄의 내용은 구원 받기전을 전적으로 말한다. 구원받은 이후 성도들의 회개와는 관계가 없다. 구원받은 이후에도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구원받기 전과 후의 회개의 질적내용이 다르다.
모든 사람이 지은 죄를 요한복음은 ‘세상 죄’라고 불렀고, 예수께서 세상 죄값을 치루기 위해 이땅에 왔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모두 갚았다. 어려운 말로 속죄이다. 각 개인이 태어나기 2000년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각 개인의 모든 죄 값을 피 흘려 치뤘다. 십자가의 이 사건이 복음이다. 이 사건을 각 개인이 예수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인 믿음의 상태가 구원이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에 성경은 피흘림을 죽음과 동일시한다. 피흘림이 있어야 죄 용서함이 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속죄 즉 영원한 죄 용서를 받았다. 영원한 속죄의 의미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내 죄가 용서됐다는 의미다.
내 죄를 굳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의 죄를 용서한 시점에서 굳이 따진다면 각 사람이 용서받은 죄는 모두 미래의 죄이다. 미래의 죄라는 의미도 시간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따지는 개념일뿐 십자가 시점에서 죄용서는 영원 속에서 단 한점이다.
‘구원 받기 전과 후 신분 다르듯, 죄의 관점도 다르다’
구원받은 이후 성도와 죄와의 상관 관계는? 구원받은 이후에 무엇을 죄라고 보는지 정의가 매우 중요하다. 구원받기 전의 죄와 후의 죄는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율법의 정죄를 받는 모든 죄값은 이미 치러졌다. 기존 율법이 성도를 괴롭히는 일은 없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구원받은이후 다툼이나 화내는 일, 불화, 성경에 어긋나는 삶, 불순종 등에 대해서는 자백하고 돌이키는 삶이 어찌보면 매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런데 문제는 1-2년도 아니고 10년, 20년, 30년을 동일하게 죄와 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성도의 정상적인 삶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계명에 얶매여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양심이 밝아지기에 계명을 지키기에 한계에 봉착한다. 그러면 계명을 버리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많은 새로운 계명이 주어졌다. 옛사람이 얶매였던 계명, 즉 정죄받은 율법과 구우너받은이후 새로운 계명과 차이점을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간극의 차이는 미세하다. 그러기에 알기 어렵다. 너무나 미세하기에.
구원받은이후 죄와 다툼을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노력이 부족하기에 죄와 다툼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그러면 얼마만큼 노력해야 죄와의 다툼을 극복하면서 벗어날까? 성경 계명의 특징은 얼마만큼 잘 지켜야만 100% 지키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기록이 없다.
‘죄를 극복하는 외적 모습 불교와 다르지 않아, 올바른 성도의 길은?’
불교는 싯다르타가 얻은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해 많은 승려들이 고행의 삶을 산다. 동안거나 서안거 스스로를 작은 골방에 가둬놓고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한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율법을, 계명을 지키려는 삶은 외적인 면에서만 보면 불교의 수행승과 별반 다르지 않다. 추구하는 내용만 다를 뿐이다.
어느때부턴가 죄와 다툼이 다시 시작되는 상황은 성도에게 매우 당황스럽게 다가온다. 죄에서 벗어나고 이겨내려 다툼을 벌인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성도의 정상적인 모습일까?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논리와 이성과 합리적인 성품을 주었다.
구원은 모든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선포다. 그 선포와는 달리 성도가 매일 다투는 죄의 종류는 구원받을때 죄와 구원받은후 일상에서 다투는 죄의 종류는 다르다.
죄와의 다툼은 육신의 한계 때문에 거의 지는 싸움이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면 피한다고 했지만 죄와 대적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물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처럼 싸우라는 의미는 아니다.
죄와 다툼은 사실상 승산없는 싸움이다. 육신으로는 죄와 싸워 이길수 없다. 죄성(sinful nature)을 이겨내는 방법은 죄성이 사라져야 가능하다.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어떠한 종교든지 종교인이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면 할수록 마음에 죄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파고 파도 끝이 없음을 알게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옛사람-옛자아-옛성품, 죄에서 죽은 사실 인정 매우 중요’
구원받은 이후에는 어떨까?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받은 후에는 죄와 다툼이라는 용어가 적절치 않다. 성도는 죄에서 죽었기에 죄와 멀어졌다.
다른 방향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삶을 살기 원할지 생각해 보자. 디도서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본래 선한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선한 일을 맡긴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재 창조되어 선하게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심령이 새롭게 됨으로 새사람된 성도, 아담처럼 선택의 길 주어졌다’
성경은 죄의 권능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깨뜨렸고,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다고 명백히 밝혔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여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기록이다.
우선 우리 스스로 죄에서 죽은 자인지 산 자인지 판단해야 한다. 죄에서 죽은 자는 하나님을 향해 산 자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자는 죄와 다툼에 전력을 쏟지 않는다.
구원받기 전에는 죄를 짓지 않을수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구원받은 이후에는 선택이 시작됐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지 아니면 죄를 향하여 살지 선택해야 한다. 마치 아담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져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길을 택할지 아니면 순종의 길을 택할지를 결정한 것처럼 말이다. 이점이 구원받기 전과 후의 죄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다. 너무 중요하다.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면 좌절과 냉소적인 자신을 바라보면서 죄의 종이 되고, 순종하면 의의 종이 된다. 여기에서 착각해서는 안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성을 지닌 옛사람이 죽었기에 합법적으로 의의 종이 맞다. 스스로가 알든지 모르든지 말이다. 옛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던 사람’이라고 성경은 정의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 비결,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함을 아는 지식과 인지’
설령 그리스도인이 불순종의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내 안에 여전히 옛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다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을 당시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
에배소서4장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기록했다. 새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상태이다.
골로새서에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라고 소개한다. 십자가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됐다.
로마서 6장은 죄와 다투는 삶을 말하지 않고 매일 승리하는 삶의 방법을 소개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에 따라 삶이 결정됨을 말한다. 이미 성도는 거룩케 됐다.
승리하는 삶의 비결은 갈라디아서 2장20절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다. 이는 죄악된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무시하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상징으로 알거나 단순한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죄와의 다툼은 계속된다. 그리스도는 성도에게 강제적으로 선택을 강요치 않는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매일 수시로 각자의 상태를 확인 또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의식이나 습관은 단 한번만에 변화가 오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확인하면서 현상황을 확인해야 한다. 그게 일상이 된다면 죄와 다툼일이 없다.
로마서12장에도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는 NIV에 ”be transformed by renewing of your mind“다.
골로새서의 심령을 새롭게하는 상태는 개인의 노력으로는 불가한 큰사건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심령을 새롭게할수 있다. 그래서 수동태이다. 마찬가지다. 마음의 변화는 구원받을 당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심령의 새롭게 함과 동시에 일어난다. 이때부터 마음의 변화가 시작된다. 변화는 영화 트랜스포머처럼 자동차가 로봇이 되듯이 큰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큰 변화는 십자가에서 연합을 받아들이는 성도에게만 가능하다. 로마서6장은 연합된 삶인데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연합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십자가에서 연합이다. 십자가에서 연합되었기에 부활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다. 성도는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이미 되었고 그와함께 부활에도 연합해 산 자가 됐다.
골로새서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했다.
‘성도가 거룩해졌기에 골로새서3장 용서와 사랑 가능’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음에 연합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에도 연합하여 실제 일으키심을 받았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실제 산자다. 골로새서3장에도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권면한다.
골로새서에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성도가 거룩해졌기에 거룩한 일을 할수 있게 됐다. 긍휼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으로 옷 입으라는 이유는 새사람을 입은 성도는 이같은 일을 옷입는 것처럼 쉽게 의지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에 행하기를 권면했다. 옛사람은 이런 일을 할수 없다.
구원받은 이후 옛사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완전한 구원이 아니고, 죄용서가 아니다. 성도는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아서 순종치 못함이 아니다. 알지 못해서다. 무지함은 신앙생활의 적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는 성도에게도 적용된다. 성경을 성경의 지식대로 알지못하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한다.
죄 용서함을 영혼구원이라고도 한다. NIV에서 혼(sole)의 구원으로 기록됐다. 혼의 구원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영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구원을 받을수 없다.
‘죄성, 십자가의 속죄후에도 조금 남았다면 완벽한 구원이라 할수 있나?’
구원받은 성도에게 1%의 죄라도 남아 스스로 깨끗케하는 책임이 주어지면 그죄를 깨끗케할 능력은 사람에게는 없다. 만약 자신의 죄를 스스로 깨끗케 할수 있다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돌아가실 필요가 없다.
죄가 내 안에 0.0001%만 남아 있어도 죄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실제 죽은 자가 되었다고 밝히 기록했다.
구원을 받았는데 죄성이 남아있는 옛사람이 그대라면 거룩한 성령이 어떻게 몸에 들어 올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흔히 우리는 구약의 짐승제사와 신약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혼돈하고 있지 않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구약의 짐승제사는 짐승 스스로 희생하지 않은 타의에 의한 희생이다. 또 사람의 죄를 대신해 짐승이 희생됐기에 불완전한 제사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인 정화 효과는 있었다.
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피는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와서 사탄의 시험과 죄를 이겨낸 완전한 인간으로서 자발적인 희생에 따른 구원의 길을 열었다.
‘그리스도 피의 능력, 성도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케 한다’
히브리서9장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했다.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하나님을 섬길수 있는 여건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구약 짐승 제사로는 의식적인 죄 용서는 가능했지만 양심상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할수는 없었다. 양심의 깨끗함은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십자가 희생으로 이뤄졌다. 영적 예배가 가능한 상태다.
깨끗하다는 의미의 헬라어 ‘카다리조’는 ‘더러운 것을 씻어 깨끗하게 하다’라는 의미다. 옛사람(old self)은 양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본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동시에 새사람을 입으면서 심령이 새롭게함을 입었다. 새사람은 생명이 없는 죽은 행실에서 양심을 분리시켜 깨끗함을 입었기에 성도는 죽은 행실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존재하기에 옛사람 습관 사라진다.’
베드로후서1장에도 ”그의 옛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는 의미는 죄에서 벗어난 상태의 성도를 말한다.
나와 내 자아, 자아 중심적인 옛 성품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었다. 실제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 부활에 연합됨을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사람의 변화가 시작된다.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중심을 차지하고 권리행사를 하게 될 때 비로소 죽은 옛사람의 습관이 사라지고 새사람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성도를 통해 이뤄진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리 어렵지 않게 살수 있다. 내 안에 계신 주를 의지하면서 사는 삶이기에 가능하다.